책상 위에 쌓인 종이의 키

책상 위의 종이 더미가 모니터의 아래쪽 화면을 가린 지가 한참 됩니다.

스캔해서 정리할 종이도 아니고 버려도 되는 종이도 아닙니다. 그 중간 어디쯤의 종이들이라, 한 번 손을 댈 결정이 나지 않아서 계속 쌓이는 상태로 있습니다. 통신비 청구서, 손으로 적어둔 사이트 메모, 며칠 전 출력해 본 GA4 보고서, 어디서 받은 명함 한 장, 영수증 몇 개. 종류가 다 다른데 한 묶음의 더미 안에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더미의 키가 모니터 아래 베젤 정도까지 왔습니다.

이 키를 가끔 손으로 측정합니다. 정확히 측정하는 건 아니고, 옆에 둔 머그컵의 높이와 비교해서 더미가 머그컵보다 한 손가락 위인지 아래인지를 봅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 컵보다 한 손가락 위로 올라오면 그날 저녁에 더미의 절반쯤을 옆으로 옮깁니다. 옮기는 건 정리가 아니라 자리 이동에 가깝습니다. 책상 옆 작은 협탁에 옮겨두면 그 협탁이 또 같은 모양으로 차오릅니다.

이 더미를 한 번에 다 처리하는 결정이 안 납니다.

각각의 종이가 따로 처리되어야 하는 결정 하나를 들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통신비 청구서는 자동이체 등록을 다시 손봐야 할지의 결정. 사이트 메모는 그 메모의 가설을 실제로 굴려볼지의 결정. GA4 출력물은 그 숫자를 보고 무엇을 정정할지의 결정. 명함은 답장을 보낼지의 결정. 한 종이당 한 결정. 30 장이 쌓여 있으면 30 개의 결정이 책상 위에 같이 올라와 있는 상태입니다.

결정 30 개를 한 자리에서 처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각 결정이 다른 종류라서, 한 결정에서 다음 결정으로 사고를 옮기는 데 시간이 듭니다. 통신비 결정에서 사이트 가설 결정으로 옮기려면 머릿속의 맥락 자체를 갈아끼워야 합니다. 30 개를 처리하려면 맥락 갈아끼우기를 29 번 해야 하고, 그 비용이 결정 자체의 무게보다 무겁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에 다 모인 채로 며칠씩 묶여 있습니다.

portfolio 운영과 결이 닮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119 개의 사이트 각각이 한 결정을 들고 굴러갑니다. 어떤 사이트는 lift 작업을, 어떤 사이트는 noindex 를, 어떤 사이트는 ad 슬롯의 위치를 기다립니다. 119 개의 결정이 portfolio 의 한 자리에 같이 올라와 있고, 결의 차이 때문에 한 자리에서 처리되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더미를 다시 측정만 하고 옆으로 옮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옆으로 옮기는 동작이 정리와 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리 이동이고, 그 동작을 안 하면 더미의 키가 며칠 더 오릅니다. 모니터 베젤을 다 가리는 데까지 며칠이 더 걸릴지를 한 번 세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