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법 2

in #kr-diary15 days ago

세상이 난리다

프랑스의 대통령 유력 후보가 프랑스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정부의 부채를 불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즉 사실상 일부 국가부채를 갚지 않고 삭제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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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슈카월드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물론 멜랑숑의 주장은 상당히 급진적이다. 실제로 프랑스 정치권에서도 강한 비판이 나오고 있고, 시장에서 프랑스의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이 나왔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이 발언 자체보다는, 이런 주장이 이제는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부터 제우스의 법에 대해서 이런저런 글을 작성하고 있었고, 어제 그 글을 마무리했다.

제우스의 법

그러고 나서 트럼프의 캐나다, 이란 관련 기사들을 비롯해 여러 국제 뉴스들을 보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었다.

세계 1차,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일종의 세계 경찰 역할을 하면서 서로 다른 진영을 조정하고 견제했다. 물론 그 과정이 평화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냉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수많은 충돌과 대리전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국제사회에는 어떤 규칙과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질서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이 과거와 같은 의미에서의 '세계 경찰' 역할을 하기보다는, 각자의 국익과 영향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왔거나 지켜왔던 규칙조차 필요하다면 무시하고, 상대방이 같은 행동을 하면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예외를 주장한다. 결국 힘이 있는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칙을 해석하고, 필요하면 그 법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국가부채를 둘러싼 이번 논쟁도 그런 흐름에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물론 국가부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경제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고,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소각한다고 해서 단순히 국가의 빚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유럽연합과 ECB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의 주요 정치인이 수천억 유로 규모의 부채를 '불에 던져버리자'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실제 대통령 선거의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문득 히틀러가 떠오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 역시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부채 문제를 안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부과된 배상금은 독일 사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고, 이후 독일에서는 이를 둘러싼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독일은 기존의 국제질서와 전쟁배상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의 프랑스를 당시의 독일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지금의 유럽에는 당시와 전혀 다른 제도와 국제적 안전장치가 존재한다. 다만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 순간 정치적인 문제가 되고, 정치적인 문제가 다시 기존 질서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라는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결국 누가 그 부담을 떠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부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기존의 제도와 규칙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진다.

어느 순간에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이 빚을 갚아야 하는가?”

어쩌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이런 흐름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국제정세를 보고 있으면 단순한 경제위기나 정치적 양극화 이상의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질서가 더 이상 예전만큼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경제에서도, 국제법에서도, 그리고 정치에서도. 과거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하나씩 시험대에 올라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과도기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새로운 질서가 더 나은 질서일지, 아니면 정말로 힘이 법보다 앞서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중국의 역사가 떠오른다.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아주 긴 혼란의 시기가 있었다. 기존의 주나라 중심 질서가 무너지고 수많은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각자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기존의 규칙과 질서는 더 이상 모든 국가를 묶어두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보고 있는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리고 결국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 수백 년간 이어진 혼란이 끝나고 하나의 거대한 국가 아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질서가 등장했다. 물론 진나라의 통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력한 국가권력과 엄격한 법을 통해 사회를 통제했고, 결국 그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의 긴 역사를 바라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찾아오고, 다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통일 왕조가 무너지고 여러 세력이 충돌하면 다시 혼란의 시대가 찾아오고, 그 혼란이 극에 달하면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역사는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질서의 붕괴와 재편이라는 패턴은 반복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의 모습도 그와 비슷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졌던 국제질서가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왔던 규칙과 제도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각 국가가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주장하고, 필요하다면 기존의 규칙에 도전한다. 마치 새로운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것처럼, 지금의 혼란 역시 언젠가는 끝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진나라처럼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도, 중국도, 러시아도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세계질서는 하나의 패권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강대국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균형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 과정이 얼마나 평화롭게 진행될 것인가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 과거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가 무너지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의 끝에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이 훗날 역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2020년대와 203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아마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매일 새로운 뉴스가 나오고, 또 다른 전쟁과 경제위기와 정치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훗날 뒤돌아본다면,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있는 이 사건들이 하나의 거대한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고 평가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은 세상이 정말 난리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도 든다. 과연 다음에는 어떤 질서가 만들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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