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법

in #kr-movie16 days ago (edited)

영화 오디세이를 반복해서 보면서 유독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다.

제우스의 법을 어겼다.
제우스의 법 시대는 끝났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 율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제우스의 법'은 단순히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몇 가지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하는 최소한의 한계와 질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관점에서 오디세이를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생긴다.

오디세우스는 제우스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법을 끊임없이 넘어서는 사람이다.

어쩌면 오디세이는 바로 이 모순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제우스의 법과 환대

그리스·로마 신화에는 제우스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프리기아의 한 마을을 찾아간다. 신분을 숨긴 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은 이들을 외면한다. 누구도 낯선 이방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만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자신들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음식과 집을 기꺼이 내어준다.

결국 두 신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노부부에게 은혜를 베푼다. 환대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려지고, 노부부의 집은 신전으로 바뀐다. 죽어서도 함께하고 싶다는 두 사람의 소원 역시 이루어져,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서로 맞닿은 두 그루의 나무가 된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환대(xenia)라는 규범을 떠올리게 한다.

낯선 여행자나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일단 손님으로 받아들이며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전에 먼저 손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강한지 약한지,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일단 환대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비합리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낯선 사람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환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우스의 법'이라는 것이 단순한 종교적 계율을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인간적인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우스의 법이 이야기하는 질서의 한 모습이 아닐까.

인간의 욕망에 스스로 한계를 두는 것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여행하고, 교역하고, 전쟁하고, 다시 만났다. 이런 세계에서 낯선 사람을 언제나 적으로 취급한다면 공동체 사이의 신뢰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환대와 맹세, 손님에 대한 보호와 같은 규범은 단순한 도덕적 장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장치였을 것이다.

물론 제우스의 법이나 환대의 규범이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구조에서 직접 만들어졌다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과 욕망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는 규범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제우스의 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법이란 단순히 “이것을 해라.” 라고 명령하는 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오히려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 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

힘이 더 세다고 해서 약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손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된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복수하고 싶다고 해서 끝없이 복수해서도 안 된다.

즉 제우스의 법은 인간의 행동을 제한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제한 때문에 인간 사회가 유지된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이 법을 어긴 사람이다

여기서 오디세이가 재미있어진다. 왜냐하면 제우스의 법을 이야기하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 오디세우스 자신이 그 법과 상당히 모순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뛰어난 전략가이며, 무엇보다 기만과 책략에 능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전략 중 하나가 트로이 목마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겨두고 철수하는 척한다. 트로이인들이 그것을 성 안으로 들여놓자, 목마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밤에 빠져나와 성문을 열고 트로이를 공격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기발한 전략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기만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전쟁에서는 평화로운 시대라면 금지되거나 비난받을 수많은 행동이 허용된다.

살육, 약탈, 거짓말, 기만, 파괴.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가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바로 그러한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그는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필요하다면 질서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그는 결국 질서가 존재하는 세계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모순이 시작된다.

#폴리페모스와 오디세우스

이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폴리페모스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원작과 상당히 다르게 각색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폴리페모스는 제우스의 법, 특히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 xenia를 완전히 무시한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들어가고 자신들을 환대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폴리페모스는 그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가둬놓고 한 명씩 잡아먹는다.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순히 잔인한 행동을 넘어선다.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성한 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다. 오디세우스 일행 역시 완전히 무고한 손님이라고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폴리페모스의 허락을 받고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동굴에 먼저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음식과 재물을 발견하고 폴리페모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이 손님이므로 당연히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폴리페모스에게는 전혀 다른 상황일 수 있다.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결국 두 세계의 규범이 충돌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손님으로 생각하고, 폴리페모스는 그들을 침입자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폴리페모스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손님이든 침입자든 사람을 붙잡아 먹어버리는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폴리페모스는 제우스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의 바깥에 있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꾀를 낸다. 그는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먹이고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닌 자(Outis)'라고 속인다. 그리고 폴리페모스가 잠든 사이 동료들과 함께 그의 눈을 찔러 멀게 만든 뒤 양의 배에 매달려 동굴에서 빠져나온다.

여기까지는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과 동료들이 죽임을 당할 상황에서 힘으로 맞서는 대신 지혜와 기만을 이용하여 탈출한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오디세우스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metis, 즉 상황에 맞게 꾀를 내고 상대를 속이는 지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동굴을 빠져나온 오디세우스는 배를 타고 멀어지면서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나는 오디세우스다.”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조금 전까지 그는 '아무도 아닌 자'였다. 자신의 이름을 숨겼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왜 그랬을까?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여기에는 단순한 실수 이상의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지혜만큼이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폴리페모스를 속이고 탈출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가 폴리페모스를 이겼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사용했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익명성'을 스스로 버린다.

그리고 폴리페모스는 자신의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를 저주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결과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오만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뛰어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와 그가 끊임없이 고통받는 이유가 사실 같은 곳에서 나온다.

그는 누구보다 영리하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의 힘을 숨길 줄도 알지만, 자신의 이름을 숨기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제우스의 법이라는 앞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나는 살아남았고, 이제 떠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자신이 폴리페모스를 속이고 눈을 멀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즉 그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힘을 과시한다. 제우스의 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힘과 욕망에 스스로 한계를 두는 것이라면, 오디세우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실패한다. 그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을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위험을 불러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폴리페모스와 오디세우스의 관계는 단순히 '괴물에게 잡힌 영웅'과 '괴물을 물리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서를 위반한다. 폴리페모스는 낯선 자를 손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디세우스는 생존을 위해 상대를 속이고 공격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미 끝난 싸움에 자신의 이름까지 덧붙인다.

폴리페모스는 환대의 법을 어겼고, 오디세우스는 절제의 법을 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인물은 폴리페모스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인지도 모른다. 폴리페모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만적인 존재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문명과 야만, 질서와 폭력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그는 질서를 이해한다. 하지만 필요하면 질서를 깨뜨린다. 그는 자신의 힘을 통제할 줄 안다. 하지만 영광을 위해 그 통제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파괴한 질서가 있는 곳, 이타카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가 영웅인 이유와 그가 끊임없이 고통받는 이유는 사실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의 논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단순한 모험 이야기로만 보기 어렵다. 트로이 전쟁은 끝났지만 오디세우스의 세계에서는 전쟁의 논리가 계속된다. 적을 속이고, 위험을 제거하고, 필요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그는 이타카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페넬로페에게, 텔레마코스에게, 자신이 왕이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즉 그는 끊임없이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면서 동시에 질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것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의 가장 큰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질서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 역시 폭력과 기만인 경우가 많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오디세우스의 귀환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가 된다. 이타카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떠난 동안 자신의 집과 권력을 차지하려 한 구혼자들과 맞서게 된다. 그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면서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소비하고, 왕이 없는 틈을 이용해 기존의 질서를 장악하려 한다.

오디세우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무질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폭력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제우스의 법을 회복하는 행위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일까?

여기에서 오디세이는 상당히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질서를 파괴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질서를 파괴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전의 질서를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력으로 폭력을 끝낼 수 있는가. 복수로 복수를 끝낼 수 있는가. 그리고 힘으로 질서를 만들 수 있는가. 오디세이는 이 질문에 아주 깔끔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오디세우스라는 인물 자체를 통해 그 모순을 보여준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폭력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의존하여 회복된 질서는 또 다른 폭력의 씨앗을 남길 수도 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제우스의 법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영화에서 반복되는

“제우스의 법 시대는 끝났다.”

라는 말이 단순히 신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세계가 도래했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제우스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인간에게 이런 말이 필요했다.

힘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손님은 보호해야 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복수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법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을까. 결국 가장 강한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세계가 될 수 있다. 내가 가진 힘이 곧 나의 권리가 되고, 내가 상대보다 강하기 때문에 상대의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사회를 유지하던 최소한의 신뢰가 사라진다.

오디세우스는 왜 끊임없이 질서를 갈망하는가

이렇게 보면 오디세우스의 긴 여행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전쟁에서 질서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파괴된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폭력과 기만을 경험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는다. 그곳이 바로 이타카다. 하지만 이타카 역시 그가 떠나 있을 때 이미 무너져 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결국 자신의 집을 되찾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질서를 되찾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가 정말 그리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집이라는 공간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세계였을까.

나는 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자유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고, 내가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고 있으며, 상대방 역시 나에게 일정한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세계가 필요하다.

질서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에 경계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바로 그런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제우스의 법은 정말 끝났는가

그래서 영화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우스의 법 시대는 정말 끝났는가?

신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우스의 법을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많은 규칙과 법을 만들고, 서로의 행동에 한계를 설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아무런 제한이 없을 때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확대할 수 있다. 그래서 문명은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해도 되는 것은 다르다고.

아마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제우스의 법'의 핵심이다. 제우스의 법은 인간에게 착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단순한 도덕률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내가 가진 힘을 어디까지 행사할 것인가.
내 욕망을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 타인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가.

오디세우스는 이 질문에 아주 복잡한 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제우스의 법을 어기면서 살아남았고, 때로는 그것을 어겼기 때문에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파괴한 질서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어쩌면 오디세이가 말하는 '귀환'은 결국 이것인지도 모른다.

폭력과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살아남은 인간이, 다시 자신과 타인을 제한할 수 있는 질서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제우스의 법은 단순한 고대의 신화 속 법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이 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힘을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힘을 스스로 제한할 수 없다면, 과연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가능한가?

아마 '제우스의 법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법이 사라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않는 세계가 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문명이란, 바로 그 한계를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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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글을 올리는데 권한이 없다고 계속 뜨지...

수정 완료.. 마크다운 편집기에서 작업하던걸 steemit으로 옮겨오면서 뭔가 오류가 생기나보다.

Upvoted! Thank you for supporting witness @jswit.